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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과의 만남 · 7> 중국과의 바닷길을 지키는 수호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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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25-12-05 15: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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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泰安 東門里 磨崖三尊佛立像)
  • 국보(지정일 2004. 8. 31) / 소재지 :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산 5
  • 김재필 (사진작가 · 필아트영상 대표)

“교수님 저희 마을 뒷산에도 부처 그림이 새겨져 있는 큰 바위가 있는대유.”

1960년대초 한국 미술사학자 황수영(1918~2011 한국문화사학회 명예 회장) 박사가 대학에서 <서산 마애삼존불>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던 중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말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태안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이하 마애불로 칭함)의 일화는 이곳을 찾았을 때 문화관광해설사 고종남 씨에게 들은 얘기다.

그 말을 들은 조사팀은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다음 날 환희와 기대 속에 단숨에 달려간 그들은 태안시장에서 자장면으로 대충 점심을 때우고 험한 길을 1시간여 동안 올라가 태을동천 맞은편에 17도 정도 기울어진 부채꼴 모양의 큰 바위에 빗물을 피하기 위해 사각으로 판 감실 안에 서 있는 마애불을 친견했다. 

당시 마애부은 무릎까지 땅에 묻혀 있었는데, 그 전엔 일제치하인 1927년에 간행된 『서산군지(瑞山郡誌)』 권1 「산악 백화산조」에 “산 중복에 태을암이 있고 암자 뒤에 암각(岩刻) 고불상(古佛像) 2좌가 있다.”라고 세상에 알렸으나 지방의 자료에만 기재하고 거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다가 학계에 정식으로 알려진 것은 1962년이었다.

그 후 마애불은 1966년에 보물 제432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던 중 1967년 3월 9일부터 태을암 주지와 강감천 스님 등이 서산교육청의 양해를 얻어 불상 하체 부분과 연화대좌를 덮고 있던 토사를 걷어내고, 재정비하여 전신이 드러난 완전한 모습을 갖추면서 학술적 조사 및 연구와 고증을 거치고 태안군의 품의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국보)에 선행하는 조형 양식을 지닌 백제 최고(最古)의 마애삼존불입상으로서 재평가받아 보물 제432호에서 2004년 국보 제307호로 승격되었다.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 전면

현존하는 백제시대의 마애불은 <예산화전리사면불> 및 <서산용현리마애삼존불>과 함께 세 곳뿐인데 모두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헌데 왜 이 지역에만 마애불이 조성되었을까?

백제시대에 서산 · 태안 지역은 중국 산동반도와 가까운 교역로로 서해안을 통한 해양무역이 성행했으며, 이 지역은 중국에서 들어온 사람과 물목들이 사비성(부여)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당시 바닷길은 항상 위험이 따르는 여정으로 일찍이 불교를 받아들인 백제의 백성들은 부처님에게 바닷길의 안녕을 빌었다. 그 전까지 바위신앙에 기대었던 백성들의 염원은 불교의 발달로 교역로 근처의 바위에 마애불을 새기어 그곳을 오가는 남편과 아들 등 가족의 안전과 가문과 나라의 번영을 기원했을 터. 태안의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도 서산의 <용현리 마애삼존불>과 함께 같은 맥락에서 조성되었을 것이다.

우측 불입상 상호

중앙 보살입상 상호

좌측 불입상 상호

마애불이 위치한 태안의 진산 백화산(白華山, 284m)은 태안 팔경 중 첫째로 꼽히는 곳으로, 태안읍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나 백제시대엔 그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포구였다 한다.

백화산 중턱에 자리한 낙조봉에서 조망되는 일몰 광경은 태안의 전래 팔경인 소성팔경(蘇城八景)의 제3경인 ‘태을낙조(太乙落照)’로 회자되고 있다. 멀리 서해를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어 백화산은 일찍부터 군사기지로 활용되어 왔고, 현재도 북봉(北峰)은 군사기지로 이용되고 있다. 백화산은 바위로 이루어진 암산이어서 석양에 반사된 모습이 달밤에 활짝 핀 목련 같기도 하고, 희디흰 자작나무를 연상시킨다는 문명대(미술사학자)의 표현은 매우 시적(詩的)이다.

그러나 태안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중국, 일본과 해상활동의 전진기지로 바다가 생활터전인 이곳 사람들은 극심한 자연재해에 빈번히 노출되어, 해난(海難) 주제의 성격이 강한 관음신앙이 성행한 곳이기도 하다.

백화산의 ‘백화’는 관음을 지칭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승발원문’이 화엄사상에 입각한 청정법신사상에 근거하고 있다면 「백화도량 발원문」은 관음신앙에 바탕을 둔 것이다. 


백화산 8부 능선쯤에 자리한 태을암까지는 차도가 비교적 잘 닦여져 있다. 차에서 내리니 마애불 안내판 앞에서 문화관광해설사가 탐방객들에게 해설하고 있었다. 중간에서 참여하기가 어색하여 일단 태을암 마당을 지나 30여 미터쯤 걸어가니 백제 사비성을 향한 동남방향으로 위치한 마애불이 있는 보호각이 보인다.

보호각에서 참배객을 맞이하는 마애삼존불입상. 지붕과 옆면만 가렸으면 좋았을 텐데 전면까지 가리니 답답해 보인다. 

6세기 말쯤 조성되었다니 1,500여 년의 세월의 흐름 속에 얼굴을 포함한 전신은 풍파에 마멸되고, 이제껏 탐사했던 여타 마애불처럼 불상의 코와 귀를 갈아 마시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옛 민간신앙으로 인해 코는 마모되어 있지만 아직 잔잔한 미소가 배어 나오는 입술은 1,500년을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미소에 대해 이어령(1934~2022, 前 문화부장관, 이화여대 석좌교수)은 그의 저서 『말로 찾는 열두 달』(문학사상사)에서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발견 당시의 사진 (문화재청 자료사진)

“불상(마애불)은 깨지기 쉬운 코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은은한 미소를 담고 있는 움푹 패인 입술에 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수천 년 동안 비와 바람에 닦이고 배불정책(排佛政策)으로 인간의 손에 의해 상처를 입는다 해도 그 입술에 어리는 미소만은 용케 살아 있다. (중략) 

오래된 옛 석불일수록 그 미소는 생동감에 넘쳐 있다. 코는 역사의 것이지만 입술의 미소는 역사를 넘어선 영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삼존불은 차라리 원각에 가까울 정도의 고부조(高浮彫)로 조각되었으며, 《서산 마애삼존불》보다 좀 거칠고 세련미는 덜 하지만 한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마모된 얼굴인데도 이마에 백호공의 흔적이 보이고 살짝 패인 입가로 인해 고졸한 미소가 잔잔하게 배어 나와 ‘제2의 백제의 미소'를 보는 것 같다.

미리 예습을 하고 찾아가 본 것이지만 삼존불하면 중앙에 본존불이 좌우에 협시보살이 배치된 ‘1여래 2보살’인데 비해 이곳의 삼존불은 중앙에 두 손을 배 앞으로 모으고 봉보주를 받치고 있는 163cm의 보살입상이, 오른쪽에는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시무외여원인의 수인을 보인 254cm의 여래입상이, 왼쪽에는 손에 보주(혹은 盒)를 든 245cm의 여래입상이 배치된 ‘1보살 2여래’로 전무후무한 파격적 형식으로 구성돼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도상으로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두 여래상의 얼굴은 장방형이고 소발이고 머리엔 작은 육계(肉髻)가 있다. 양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으며 목에 삼도는 표현되지 않았다. 넓고 장대한 어깨에 걸친 법의는 통견으로 군의(裙依)의 띠 매듭이 보이고, U자형으로 새겨진 옷주름이 부드럽게 표현되었으나 이 역시 마모되어 희미하게 보인다.

중앙의 보살입상은 조성 당시엔 장식을 했을 것 같으나 지금은 마모로 인해 아무 무늬도 보이지 않는 삼산관을 쓰고 있으며, 관대의 양쪽으로 한 가닥의 띠가 내려져 있는 것 같다. 얼굴은 두 여래와 같이 장방형이나 타원형에 가까우며, 마모가 심해 표정을 읽기가 힘드나 역시 고졸한 미소는 잃지 않았다. 목의 삼도는 없으며, 법의 역시 통견으로 두툼하게 보인다.

삼존불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데, 보주를 든 현재불인 석가불과, 나란히 대칭되게 서 있는 과거불인 다보불(多寶佛) 사이에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삼존 형식을 이룬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 마애불은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인 『법화경』 사상을 근거로 조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보호각 우측 밖 바위에도 사비성을 향한 부처가 새겨져 있다

촬영을 하면서 카메라 뷰파인더에 들어오는 전체상을 보고 있노라니 중앙에 있는 보살상의 연화대좌가 좌우 여래상의 것보다 작으며, 또한 양옆 가장자리가 여래상의 연화대좌에 가려진 것을 보니 감탄이 앞선다.

중앙에 서 있는 보살이 좌우 여래를 뒤에서 조용히 따르고 있는 모습인데, 원근감을 적용하여 조각을 한 석공은 분명 예술적, 시각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백화산 정상 부근엔 군사기지가 있다. 그로 인해 1959년에 계곡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보호각 위를 지나면서 차량 진동과 도로를 바치고 있는 옹벽에 맺힌 습기의 영향으로 의해 조각면이 더 손상되었으리라는 추측을 해본다. 그래서인지 좌측 불입상 하단은 벌써 시커멓게 변색이 되어 있어 안타깝다. 

반 백년 동안 금지되었던 백화산 정상까지의 등산은 태안군청과 국방부의 협의 아래 2017년 5월 15일부터 개방되었다.


태을암 뒷편의 마애불 보호각

보호각 칸막이 사이로 비스듬하게 들어 온 5월의 푸름을 머금은 햇살이 부처의 손길처럼 한 참배객의 등을 토닥여 준다. 보호각을 나와 우측 돌아가니 바위에 양각되어 마모된 작은 부처상이 보인다. 해설사에 의하면 마애불이 사비성을 바라보고 있다면 이 부처상은 서해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당시 그 지방 사람들이 서해 뱃길을 무사히 지켜 달라는 염원으로 조성된 것이 아닌지 생각된다.

1,500여 년이라는 지난한 세월의 풍파에 크게 훼손된 마애불의 본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 채 그곳을 나오니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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