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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현 박종회 : 전통 문인화의 현대적 변용과 조형적 확장 - 선비정신의 계승부터 한글 서예의 회화적 모색까지
  • 이용진 편집주간
  • 등록 2026-09-08 15:54:44
  • 수정 2026-09-08 16: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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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서예문인화> 2026년 9월호 표지작가 : 창현 박종회


월간 서예문인화 2026년 9월호 표지



2026년 동덕여자대학교 박물관·미술관 기획초대전


문인화 명인 창현 박종회

《 한글사랑전 》


9. 16(수) - 9. 21(화) 동덕아트갤러리

개막행사 : 2026.9.16(수) 오후5시




전통 문인화의 가치를 지키는 것은 문인화 화목(畵目)을 답습하는 데 있지 않다. 변화가 없는 전통은 생명력을 잃고 경쟁력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창현 박종회 선생은 서예, 유화, 판화, 발묵, 고화(古畵)의 임모 등 장르의 한계를 설정하지 않고, 이 모든 기법을 통섭하여 일인다색(一人多色)의 독보적인 경지를 개척해냈다. 선생의 대형 화폭 위를 종횡무진하는 선 굵고 거침없는 필세는 수십 년간 축적된 조형적 훈련과 내공이 만들어낸 생명의 불꽃이다. 

이번 동덕아트갤러리 기획전시 <문인화 명인 창현 박종회 한글사랑전>은 ‘한글조형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놀라운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작을 중심으로 창현 박종회 선생의 예술세계를 한글 서예의 파격, 동서양 재료의 융합, 그리고 노장사상과 기개의 도상학 축으로 구체적으로 규명해보고자 한다.


문인화 정신의 현대적 재해석

창현 박종회 선생은 한국 전통 문인화의 본질인 선비정신과 소요유(逍遙遊)의 지향을 견지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기 위해 매체와 기법의 한계를 끊임없이 확장해왔다. 선생은 먹과 한지라는 동양적 매체를 넘어서 서양화의 주재료인 유화물감(油彩)과의 융합을 평생에 걸쳐 시도해왔다. 장기 보존성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순지나 캔버스 천에 유화물감을 도입하는 시도를 단행하였다. 이러한 매체의 변화는 단순한 재료적 결합이나 보존 목적에만 머무르지 않고, 동양 정신을 서양미술의 표현 방식으로 표출하기 위한 치열한 조형적 고뇌의 결과물로 발전하였다.

먹의 깊이와 유화물감의 강렬한 색채를 혼용하는 묵유채(墨油彩) 기법은 흑백의 극명한 대조 속에서도 이질적인 재료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미학적 성취를 이끌어냈다. 이질적인 매체의 결합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선생은 “먹과 한지, 유화물감의 어울림을 끌어내는 조화의 과정은 무척이나 험난했다.”라고 토로한 바 있다. 선생은 재료의 물리적 결합이라는 ‘소재주의적 차원’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심의(心意)와 정신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문인화 고유의 구도, 소소밀밀(疏疏密密), 극적인 생략과 과장이라는 법칙을 고스란히 유화 화면에 이식시켜냈다. 


박종회 作, 진도아리랑, 49×35cm

창현 선생의 독특한 서체와 운필은 삼베로 만든 종이인 마지(麻紙)의 거칠고 투박한 매체를 만나면서 한 차원 높은 예술적 격조를 획득한다. 이번 전시에서 마지를 주된 작업 매체로 채택하였다. 마지 특유의 거친 표면이 붓의 흐름에 저항하면서 만들어내는 독특한 갈필과 먹의 절제된 번짐 효과를 통해 작품에 무겁고 깊이 있는 미감(美感)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선생은 일부러 까끌까끌하고 거친 작품지 뒷면을 사용하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작업 방식을 고수한다. 거칠거칠한 한지의 뒷면이나 마지는 붓을 강하게 밀어내면서 묵직하고 심오한 서권기(書卷氣)를 뿜어낸다. 전남 보성에서 평생 전통 방식으로 삼베 마지를 제작해온 보성삼베랑의 이찬식 장인과의 깊은 인연은 선생의 예술 세계를 확장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창현 선생의 거친 갈필과 발묵의 미감을 이상적으로 살려주는 최고의 무대가 되었다. 마지에 먹과 유채가 스며들고 번져 나갈 때 발생하는 입체적 균열과 거친 질감은 동양적 심미의 극치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처럼 선생의 화면은 동양의 유구한 정신과 서양의 강렬한 물질, 그리고 마지의 질박한 자연성이 한데 어우러진 조화의 현장을 구현하였다. 


詩書畵 합일과 한글 서예의 회화적 모색

창현 선생의 예술 세계에서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은 고정된 양식으로 박제되지 않고, 작품의 화제(畵題)와 서사에 따라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특징을 지닌다. 선생은 역대 명가들의 한시뿐만 아니라 근현대 민족 시인들의 한글 시를 화제로 삼아 시문(詩文)의 결에 따라 붓의 표현을 달리하는 일인다색(一人多色)의 경지를 선보였다. 동일한 매화나 난초를 그리더라도 다산 정약용의 시와 이육사의 시가 내포한 정신적 층위가 다르듯, 텍스트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구도와 필치, 색상을 변용하여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의 경지를 현대적으로 구현해낸 것이다. 여덟 살에 붓을 잡은 이래로, 한평생 묵향과 함께해온 선생의 필력은 서예라는 장르가 가질 수 있는 극상의 힘과 깊이를 내포하고 있다. 

선생은 한글서예에 있어서 독창적인 조형성과 현대적인 회화성(繪畵性)을 길어 올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기존 궁체의 정형화된 한계에서 벗어나 보고자 이쑤시개나 나무젓가락 등 비정형적 도구를 사용하여 변화무쌍한 선의 질감을 실험하였다. 기존의 운필 규칙이 무너지고, 그 틈새에서 예측할 수 없는 날카롭고 육중하며 질박한 조형성이 터져 나왔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실험을 바탕으로 다시 부드러운 붓을 잡았을 때 발생한 상호작용이다. 선생은 미세한 세필(細筆)을 사용해 이쑤시개로 쓸 때 느껴지던 거칠고 날카로운 필선을 역(逆)으로 구현해내기 시작했다. 붓끝이 종이에 닿을 때 점과 점 사이, 가로획과 세로획 사이에서 발생하는 팽팽한 긴장감과 아주 가늘면서도 극도로 굵어지는 기이한 대비감은 파격의 극치였다. 이렇게 하여 한글 자음과 모음이 지닌 형태적 아름다움을 추상적 회화로 끌어올렸다. 


박종회 作, 늘고당, 35×62cm


선생의 한글서예 연구에 대한 진정성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인 한글의 원형을 깊이 터득하려는 구도자적 노력에서 유래한다. 선생은 한글이 지닌 고유하고 예스러운 맛, 즉 훈민정음 초기 판본의 미감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필생의 대작들을 창작했다. 대표적인 작업이 바로 가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9,986자)이다. 세종대왕 상을 전면에 배치하고, 가로 약 8m, 세로 2.05m에 달하는 거대한 마지에 완필한 기념비적 대작이다. 또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역시 해설까지 전부 포함하여 가로 7m에 이르는 대형 폭 위에 쓰여졌다. 한글의 초기 원형을 해설까지 온전히 완필해 낸 것이다. 한마디로 금속활자나 목판 인쇄가 지닌 고유의 공간감과 획의 질감을 붓으로 재해석한 역작이다. 

선생은 이 작업을 통해 “한글이 지닌 금속 활자나 목판본 특유의 질박하고 육중한 맛을 온몸으로 터득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한글이 한문보다 구조가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변형과 창조가 극도로 어렵지만, 그 단순함의 극치야말로 현대 미술가로서 끊임없이 도전해야 할 매혹적인 숙제라는 것이 선생의 지론이다. 

나아가 선생은 한글 서예의 화제(畵題)와 내용 면에서도 전례 없는 개방성을 보여준다. 김소월, 백석, 신동엽, 윤동주, 이육사, 정인보, 한용운 등 우리 민족의 아픔과 서정을 노래한 시인들의 주옥같은 시를 깊이 읽고, 시인의 초상과 문학적 심상을 서화로 구현해냈다. 판소리 춘향가의 ‘사랑가’나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의 구절구절에 깃든 해학적인 민중의 정서를 시각화하는가 하면, 배호, 현인, 남인수 등 세상을 떠난 명가수들의 트로트 대중가요 가사까지 화폭으로 당당히 끌어들였다. 이는 시, 서, 화가 일체를 이룬 상태에서 대중의 삶과 정서에 귀를 기울인 민중적 문인화의 현대적 귀환이라 평가할 수 있다.


박종회 作, 세종대왕과 월인천강지곡, 76×145cm, 12폭 (총 9,986자)


철학적 사유의 시각적 은유

창현 선생의 회화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단순한 자연물이나 인물을 넘어 작가 자신의 내적 지향과 철학적 사유가 투영된 강력한 시각적 은유이다. 작품 속에 빈번히 등장하는 오류선생, 등산객, 낚시꾼, 스님 등의 인물은 도가적 은일(隱逸)과 유가적 수기(修己)를 실천하려는 작가의 분신으로 기능한다. 특히 「추사선생상」이나 반가사유상 모티프는 추사의 고뇌, 오류선생의 고결함, 불교적 사유가 화면 속에서 다층적으로 포개지며 정신적 깊이를 더한다. 

2014년 프랑스 퐁피두센터 광장에서 펼친 대형 소나무 휘호 퍼포먼스와 메타노이아 갤러리 초대전에서 유화로 그린 「반가사유상」과 먹으로 그린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병치한 것은, 동서양의 정신세계를 문인화의 화법으로 관통하려는 철학적 확장의 결과이다. 

무엇보다 선생은 한글의 여백 처리에 있어서도 단순히 비워두는 ‘여백’의 개념을 넘어, 작가의 의도적 사유가 머무는 공간인 ‘유허(留虛)’의 개념을 적용하였다. 선생은 “관객들이 볼 때는 그림 속의 단순한 빈 자리인 여백이겠지만, 작가에게는 뜻과 정신을 머무르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담하게 비워둔 빈 터, 즉 유허이다.”라고 설명한다. 유허를 통해 관객은 선생이 남겨둔 무한한 공간과 사유의 여정을 스스로 채워나가는 진정한 자유, 즉 어떠한 외물(外物)에도 얽매이지 않는 정신의 절대 자유 상태인 ‘소요유(逍遙遊)’를 경험하게 된다.

최근 선생이 집중하여 이번 전시에 7점을 선보이는 「부석(浮石)」 시리즈는 노장사상(老莊思想)과 철학적 은유가 가장 극적으로 발현된 결과물이다. 맑은 냇물이나 허공에 무거운 바위가 떠 있는 초현실적인 구도는 물리적 법칙을 거스르는 현대 사회의 부조리와 상실된 인륜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비판적 시선을 담고 있다. 전지 크기의 거대한 화폭에 장주지몽(莊周之夢)을 상징하는 나비가 돌을 옮기거나, 여타의 배경을 모두 소거한 채 ‘유허(留虛)’의 공간 속에 부석만을 고립시키는 대담한 배치는 관람객에게 강렬한 성찰의 시간을 요구한다. 현실의 모순을 고발함과 동시에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는 무위(無爲)의 미학을 완성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박종회 作, 한글 인류의 자산, 69.5×68cm


지칠 줄 모르는 조형적 변혁

창현 박종회 선생은 전시회마다 놀라운 실험 정신과 분출하는 에너지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팔순을 훌쩍 넘겨 구순을 향해가는 선생의 물리적 나이는 예술적 완숙미를 논하며 안주하기 쉬운 시기이지만, 선생은 오히려 해묵은 도식을 과감히 깨부수고 새로운 영토로 나아가는 도약대일 뿐이다.

2023년, 산수(傘壽, 팔순)를 맞아 개최한 개인전 《傘壽, 변혁은 시작됐다》의 전시명은 선생의 예술적 태도를 가장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창현 선생은 변화 없는 전통은 고인 물과 같아 경쟁력을 상실한다는 확고한 철학 아래 파격적인 조형적 훈련을 지속하고 있다. 대형 화폭을 거침없이 장악하는 필세, 캔버스와 마지를 오가는 실험, 한국적 상징물과 문양의 융합, 서사성과 추상성을 넘나드는 기법의 변주 등은 오랜 세월 축적된 노련함과 변혁적 에너지가 결합된 산물이다. 

또한, 대중에 비교적 덜 알려진 독립기념관의 2m가 넘는 「광복군 선언문」 비문과 어린이대공원의 고하(古下) 송진우 선생 일대기 비문 등 국가적, 역사적 무게를 지닌 대형 금석문 작업을 수행해 온 사실은 선생의 서예가 지닌 단단한 역사적 뿌리와 공적 가치를 증명한다. 전통 서예의 엄격한 규율에서 출발하여 문인화, 판화, 서양화를 두루 섭렵한 후 다시 한글 서예의 세계화와 회화적 변혁으로 회귀한 선생의 예술 여정은 시대와의 호흡을 통한 끝없는 탈각(脫殼)의 문인화 정신을 보여준다. 

창현 선생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가치는 ‘선비정신’과 ‘한국적 심미(尋美)’의 탐구이다. 선생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역사와 정서, 그리고 오늘의 한국인이 느끼는 삶의 희로애락을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조형 언어로 번역해내는 데 필생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장준석 미술평론가는 선생에 대해 “시류에 영합하거나 남의 것을 모방하지 않고, 대상이나 소재를 정직하고 순수하게 바라보며 사색하고, 한국미의 중심에 서서 우리 정서에 적합한 조형성을 모색하였다.”라고 평한 바 있다. 이는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과 완벽히 맞닿아 있다고 하겠다.

창현 선생이 붓끝으로 일구어낸 변혁의 영토는 문인화를 현대적으로 변주했다는 양식적 평가를 넘어선다. 그것은 전통의 거대한 기둥이 지닌 조형적 기품과 깊은 정신성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문화적 죽비이자, 가장 한국적인 심미의 자화상인 것이다. “서예와 한글은 여전히 나의 영원한 숙제이자 탐구의 대상”이라는 선생에게 ‘지금’은 ‘변혁’의 시작이자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이다. 


박종회 作, 浮石, 70×138cm



창현 박종회 (創玄 朴鍾會)

1977년 고미당에서 첫 개인전 이후 지금까지 열아홉 번의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1983년 이탈리아 Astro Labio Arte 화랑 초대 6인전을 비롯하여 국내외 초청전 및 단체전에 수백 회 참여하였다. 1983년 古下 宋鎭禹 선생, 柳一韓 박사, 秀堂 金秊洙 선생, 白農 崔奎東 선생 등 碑文과 1986년 독립기념관 語錄碑 등 여러 휘호 금석문이 있으며, 「TV 미술관, 창현 박종회편」, 「한국墨梅花」, 「고교미술강좌」 등 TV에 출연하였다. 서울특별시 미술장식품 심의위원을 지냈으며, 대한민국미술대전을 비룻하여 수많은 공모전의 심사위원장과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로또서예문화상·한국예술상·미술인의날 문인화 본상·대한민국경제문화대상·자랑스런 대한국민대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대한민국전통예술전승원 문인화 명인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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