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한자문화권 문화·예술의 정수인 서예는 한자라는 문자를 쓰는 행위로부터 기인한 예술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문자는 대개 300종으로 추산하고, 현재 실제로 쓰이고 있는 문자는 약 100종 내외로 보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지만 이 중에서도 국가 단위 공용어를 표기하는 주요 문자, 즉 실질적 영향력이 큰 문자만 꼽자면 한글을 비롯하여 라틴 문자, 한자, 아랍 문자, 데바나가리 문자, 키릴 문자, 그리스 문자, 히브리 문자, 태국 문자 등 40~50종이다. 이처럼 인류 역사에는 다양한 문자들이 있어 왔고 또 현존하고 있지만, 이들 문자를 이용하여 서예라는 예술을 발전시킨 문화권은 크게 두 갈래로 압축된다. 그 하나는 중국, 한국,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한자문화권이고, 다른 하나는 아랍, 페르시아, 튀르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문화권이다. 그리고 몽골에도 몽골문자 서예가 있어서 진즉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바 있다. 이슬람문화권의 서예는 쿠란을 베끼는 사경(寫經)에서 출발하여 쿠파체, 나스흐체, 술루스체 등 다양한 자체와 서체가 독자적인 심미관을 가지고 발전함으로써 아랍인뿐 아니라 페르시아, 오스만 튀르크, 중앙아시아 등 이슬람 문화권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자료1] 아랍서예
[자료2] 몽골서예
한자문화권의 서예는 주지하다시피 전(篆), 예(隷), 해(楷), 행(行), 초(草) 등 이른바 5체의 자체(字體)를 형성하며 발전해 왔고, 다시 5체를 쓰는 각 서예가의 예술적 감각과 미적 지향을 반영하여 창출된 각종 서체가 시대를 풍미하면서 기나긴 역사를 이어왔다. 게다가 한국의 경우에는 한글이라는 자국 문자를 창제함으로써 한자서예와 한글서예가 두 축을 이루며 발전해 왔다. 앞으로도 한글서예와 한자서예 두 축이 서로 상승작용을 하면서 발전할 것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의 서예가 중국의 서예보다 훨씬 더 큰 발전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의 가나 문자에 대한 한글의 월등한 우수성을 통해서 볼 때 일본의 서예보다도 한국서예가 한층 더 높은 예술적 지향과 넓은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한국서예는 한자라는 문자를 쓰는 행위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중국 서예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창작기법, 감상안목, 교육방법, 사용하는 재료와 도구 등 많은 부분에서 영향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무엇을 어떤 형식으로 쓸 것인가라는 문제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서사 행위의 시작은 당연히 실용적인 의사전달과 기록보존을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서사 즉 쓰는 행위를 예술행위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대개 중국의 동한(東漢) 말기로 보고 있다. 동한 말기에 이르러 ‘書’라는 글자에 대한 해석이 기왕의 ‘저(著)’ 즉 ‘음성언어를 문자언어로 나타내는 행위’로 보던 것에다가 ‘산(散)’ 즉 ‘마음에 쌓인 회포를 풀어놓는 행위’가 추가되었기 때문에 이 ‘산(散)’ 개념의 출현을 근거로 역대의 서예사 연구자들은 동한 말기를 서(書)의 ‘예(藝)’화(化) 현상이 일어나는 시기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잘 쓴 글씨에는 오늘날 개념의 ‘예술가’로서의 서자(書者)의 이름을 밝히기 시작하였다. 즉 서예가가 등장하였고 사회는 그 서예가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한나라 말기의 채옹(蔡邕), 장지(張芝), 두도(杜度) 등이 중국서예사에 서예가로서 이름을 남기기 시작한 인물들이다. 이후, 위진 남북조시대에 이르러서는 왕희지 왕헌지 부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서예가들이 등장하면서 기록보존을 위한 서사행위로서의 서(書)와 예술로서의 서예(書藝)가 확고하게 병존하게 된다.
[자료3] 蔡邕이 쓴 喜平石經
[자료4] 張芝의 초서 작품
예술은 일정한 형식을 요구한다.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틀’로서의 형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동한 말기 이후, 기록 보존을 위한 서사행위는 그대로 존재하면서도 ‘산(散)’ 즉 회포 발산 중심의 서예(書藝)가 크게 유행하면서 서예를 담기 위한 ‘틀’로 널리 사용된 것이 바로 ‘척독(尺牘)’이다. 한나라 때에 주로 사용하던 ‘간(簡’) 즉 죽간(竹簡), 목간(木簡)이 대나무처럼 폭이 좁은 목재 위에 글씨를 쓰고 그것을 엮어놓은 형태라면, 척독(尺牘)의 ‘독(牘)’은 얇게 뜬 넓은 나무 판때기이다. 척독(尺牘)은 가로 세로가 각 1척(尺) 남짓한 판때기를 이르는 말인 것이다. 한나라 말기 이후로 문인 서예가들은 이러한 판때기 즉 척독에 자신의 회포를 담은 글을 아름다운 글씨로 써서 상대에게 보냈다.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처럼 왕래하는 편지들이 당시에 서예라는 예술행위를 담는 ‘틀’로서 작용하였다. 그러다가 채륜(蔡倫, 61혹 63~121)이 종이를 발명한 이후로는 나무 판때기가 아닌 사방 1척 정도인 종이에 편지를 씀으로써 재질이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나무 판때기 척독의 전통은 후대까지 그대로 이어져 편지 종이는 으레 사방 1척 정도의 크기였으며 편지에 대한 명칭 또한 척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후, 생산하는 종이의 사이즈는 대부분 척독크기 즉 사방 1척 정도이거나 가로 세로 중 어느 한쪽이 약간 긴 사이즈의 종이로 표준화되었다. 현전하는 한나라 말기로부터 위진 남북조시기의 서예 유산들은 거의 다 이런 척독 사이즈의 ‘틀’에 맞춰서 창작된 것들이다.
[자료5] 왕희지의 대표적인 척독 작품 <快雪時晴帖>
[자료6] 敦煌卷子 殘卷
그러다가 종이에 장문의 저술(경서나 역사서 등)을 베끼면서부터 길이가 긴 두루마리 형태의 책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긴 두루마리 형태의 책을 ‘말(roll) 권(卷=捲의 본 글자)’과 명사에 붙이는 접미사인 ‘子’를 써서 ‘권자(卷子)’라고 부르게 되었다. 1900년대 초,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시(敦煌市)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문서들이 바로 이러한 권자 형태이다. 이때 발견된 권자는 거의 다 가로 두루마리 형태이며 두루마리의 첫 부분과 끝부분에 말기 편하도록 등근 형태의 막대기를 붙인 것도 있고 붙이지 않은 것도 있다. 이러한 권자 형태가 차츰 발전하여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서화작품을 장식하는 하나의 표장(表裝=표구) 양식으로 정착하였다. 특히 선화(宣和, 1119~1125) 연간에는 서화를 애호하고 실지로 화가이자 서예가로 이름을 남긴 북송의 황제 휘종(徽宗) 조길(趙佶)의 서화 애호정책에 힘입어 이른 바 ‘선화장표(宣和裝裱)’의 양식과 ‘선화칠새(宣和七璽)’라는 형식을 낳게 되었다. ‘선화칠새’는 찍어야 할 7종의 도장 위치를 말한다.
[자료7] 송나라 선화연간에 정착한 宣和裝裱의 양식과 ‘宣和七璽’의 위치[자료7]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맨 오른편 첫 부분의 ‘릉천두(绫天头: 綾天頭)’는 비단을 댄 부분이다. 그 다음의 ‘전황견격수(前黄绢隔水:前黃絹隔水)’는 ‘앞에 댄 노랑 비단 물 건너’라는 뜻인데 여기서 ‘격수(隔水)’ 즉 ‘물 건너’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화재가 나더라도 그 다음에 자리한 ‘서화본폭(书画本幅:書畫本幅)’은 마치 물 건너편에 자리한 것처럼 화재의 피해를 당하지 말라는 기원을 담기 위해서이다. ‘서화본폭’ 뒤에도 ‘후황견격수(后黄绢隔水:後黃絹隔水)’를 댔는데 이 역시 화재로부터 ‘서화본폭’을 보호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맨 마지막에는 ‘미지(尾紙)’를 붙였는데 이 부분은 두루마리를 처음으로 말기 시작하는 부분이라서 적절히 두텁고 빳빳하여 말기도 쉽고 또 쉬이 닳아지지도 않아야 했으므로 이 부분에 붙이는 종이는 특별히 질긴 종이를 사용하였다. 대부분 우리나라(고려)에서 수입해 간 ‘고려지’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자료8] 세로 卷子(軸, 簇子)
송나라 때에 완벽하게 정착된 이 권자, 즉 두루마리 형식은 원나라 때까지도 그대로 연용(沿用)되었다. 이런 권자 형식으로 표구된 서화 작품을 당시 사람들은 넓은 탁자 위에 펼쳐 놓고 감상하였다. 그러므로 이때만 해도 가로 두루마리 형태의 작품이 많았다. 그런데, 명나라에 이르러 오늘날의 상해(上海), 소주(蘇州), 항주(杭州)를 중심으로 하는 강남지방의 건축양식이 전에 비해 천정이 훨씬 높아지는 형태로 바뀌었다. 부자 귀족과 사대부 문인들이 보다 더 시원스럽고 호화스럽게 보이도록 천정을 높여 집을 지은 것이다. 이처럼 건축 양식이 바뀌면서 높고 깨끗한 벽면이 많이 생기자, 사람들은 그 빈 벽면에 작품을 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책상 위에 펼치는 가로 두루마리 형태가 아니라, 벽에 거는 세로 두루마리 형태의 표구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에, 전에는 작품을 탁자에 펼쳐놓고 감상한 다음에는 말아서 장롱이나 문갑에 넣어 보관하였는데 이때부터 벽에 걸어둔 채 며칠을 두고 감상하다가 싫증이 나면 다른 서화 작품으로 바꾸어 거는 오늘날 미술관의 디스플레이와 같은 상황이 가정집에서 이루어졌다. 서화작품이 그 집의 인테리어 즉 실내장식에 사용된 것이다. 이때부터 걸려 있는 작품의 수준과 수량에 따라 그 집안의 부와 교양의 수준을 평가하는 풍조가 형성되었다. 이런 풍조에 따라, 서화 작품의 수요가 급격하게 늘었고, 전업 작가 그룹이 형성되었으며, 서화작품을 거래하는 상인들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작품을 표구하는 기술도 더불어 발전하였는데 이때부터 가로 두루마리와 세로 두루마리의 이름을 구분하여 부르게 되었다. 가로 두루마리는 전과 같이 권자라고 불었으나 세로 두루마리는 ‘축(軸)’ 정확히는 ‘입축(立軸)’ 혹은 괘축(掛軸)이라고 불렀다. ‘軸’은 본래 수레바퀴의 굴대 즉 회전축, 심대(心軸)를 가리키는 글자이다. 그런데 세로 두루마리로 표구된 서화의 아래쪽 끝에는 반드시 둥근 나무(혹은 옥이나 상아)로 된 막대를 감아서 대는데 이것이 두루마리를 말고 풀 때 축(軸)의 역할을 하는 부분이다. 이 축을 전체 두루마리를 대표하는 부분으로 여겨, 세로 두루마리 표구의 형식을 축, 입축, 괘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남송 시대부터 민간에서는 두루마리 표구인 권자(卷子)를 ‘족자(簇子)’라는 속어로 부르기도 했다. 후에는 권자뿐 아니라, 축도 민간에서는 족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민간 용어 ‘족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옴으로써 우리나라에서는 축보다는 족자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에서는 지금도 권자, 축, 입축, 괘축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권자, 축, 입축, 괘축이라는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족자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 ‘簇’의 본뜻은 ‘모이다’, ‘무더기 지어 뭉치다(聚集, 叢聚)’이다. 꽃이 무더기로 핀 것을 ‘화족(花簇)’이라고 하는 것이 대표적 용례이다. 그런데 두루마리 표구를 왜 족자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학계에서는 표구 작업 자체가 얇은 종이나 비단을 여러 겹 배접(褙接)하여 하나로 뭉쳐 붙이는 공정이므로, ‘여러 겹을 뭉쳐 붙인 것’이라는 뜻에서 ‘족자(簇子)’라고 불렀을 것이라 추정을 하고 있을 뿐이다. 또 실내를 장식하기 위해 무더기 지어 ‘벌여 놓거나 걸어두는 장식물’이라는 의미로 족자라는 말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다. 축, 즉 족자 형태의 표구는 중국 역사상 서화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청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형식으로 발전하며, 양산되는 여러 서화작품을 표구하는 대표적인 형식으로 그 위치를 확고히 했으며 인테리어 즉 실내장식의 주요 소품으로 기능하였다.
[자료9] 明代 長軸 서예작품 - 王鐸
[자료10] 明代 長卷 서예작품 - 文澂明
서화 표구의 한 양식으로서의 액자(額子)는 근대화와 더불어 유입된 서양 미술작품의 ‘프레임(frame)’에 상응하는 말로 사용되면서 일반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액자(額子)’와 액자(額字)는 같으면서도 다른 개념이다. ‘額(이마 액)’과 ‘字(글자 자)’를 쓰는 ‘額字’는 건물의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에 건물의 이름을 지어 판때기에 쓰거나 새겨서 걸 때에 쓴 그 ‘글자’를 이르는 말이고, 명사에 붙이는 접미사 ‘子’를 쓴 ‘額子’는 건물의 이름을 써서 거는 판때기와 비슷한 형태로 꾸민 ‘표구의 형식’을 이르는 말이다. 위진 남북조 시대 위나라의 위탄(韋誕)이 ‘능운대(凌雲臺)’라는 액자를 썼다는 기록이나, 동진의 왕헌지(王獻之)가 태극전(太極殿)의 額字를 써 달라는 청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통하여 위진 남북조 시대부터 ‘額字’라는 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후에 이 ‘額字’는 나무 판때기에 글자를 새겨서 거는 편액(扁額), 현판(懸板) 형태로 진화하여 또 하나의 한자문화권 서예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와 달리 ‘額子’는 판때기가 아니라, 종이나 비단에 쓰거나 그린 작품을 편액이나 현판처럼 걸 수 있도록 표구한 표구의 한 형태를 이르는 말인 것이다. 이러한 ‘額子’는 앞서 언급했듯이 근대에 서양 미술이 들어오면서 서양 미술작품의 ‘프레임(frame)’에 상응하는 말로 사용되면서 일반화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시대가 발달하면서 ‘額子’는 유리나 아크릴, 셀룰로이드 필름 등을 입혀 작품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진화하였고, 최근에는 ‘판넬(패널)’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額子’ 표구 형식도 서화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상으로 한자문화권에서 서화 작품을 담아 꾸미는 ‘틀’의 형태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척독, 권자, 축, 현판, 액자 등 다양한 형태의 틀이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날 주로 사용되고 있는 서화작품의 ‘틀’을 꾸미는 표구 방식에는 족자(축, 입축, 괘축과 같은 의미), 액자, 판넬 등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눈을 돌려 현재의 우리 서단과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도록 하자. 앞서 살펴본 서화작품을 꾸미는 ‘틀’ 즉 족자든 액자든 판넬이든 어떤 ‘틀’이 맞춰 작품을 표구해 놔도 사람들은 서예작품을 바라보며 한마디 한다.
“서예 작품은 현대의 인테리어와 너무 안 맞아. 촌스러워서 걸 데가 없어……. 집에 걸자니 아파트 분위기에 안 맞고 사무실에 걸려 해도 사무실 분위기와 영 안 맞아…….”
그럴듯한 얘기이다. 실내가 거의 다 세련된 디지털 기기로 채워져 있고, 벽면에는 LED 전광판 장식이 있으며, 회의자료도 거의 다 디지털이나 AI영상으로 꾸며 사용하는 환경에서 이곳저곳 아무리 둘러보아도 검정 먹 글씨를 쓴 족자를 걸 곳이 없다. 유리를 끼워 제법 세련되게 꾸민 액자도 번쩍번쩍 빛나는 디지털 기기들과 LED 전광판 장식 앞에서는 촌스럽기만 하다. ‘그래도 이게 좀 현대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판넬로 표구해 봐도 안 어울리기는 마찬가지다. 이래서 서예작품은 현대의 인테리어 환경에서 여지없이 배척을 당하고 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과거의 서예작품은 그 작품을 표구한 ‘틀’로 인해 홀시를 받아본 적은 없다. 송나라 때의 권자도, 명나라 때의 축도 우리나라에서 많이 사용한 용어인 족자라는 형식도 다 서예작품을 더 아름답게 꾸며주는 틀로써 환영을 받으며 다투어 그 틀 안에 들어있는 서예작품을 집안에 걸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예작품이 함유하고 있는 깊은 예술성에 감동하여 그 작품을 벽에 걸고자 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현실은 이 두 가지가 다 배척의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서예작품의 틀이 촌스럽다는 게 첫 번째 배척의 이유이고, 서예작품에 쓴 글의 뜻은커녕 글자도 모르겠고 설령 안다고 해도 진부한 내용이라는 게 두 번째 배척의 이유이다. 그러다 보니, ‘서예 작품에 색깔을 입히고 모양도 좀 기괴하게 하면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서예가들은 ‘흑백 미학’의 상징인 서예를 울긋불긋한 ‘색채의 미학’으로 바꿔보기도 하고, 캘리그라피라는 이름을 빌려 문자도안 형식으로 기이하게 꾸며보기도 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여전히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서예가 스스로 그렇게 색칠하여 단장하고 기괴하게 과장한 자신의 작품을 보고 있자니 그 ‘싸구려 느낌’ 때문에 오히려 부끄러워 숨고 싶은 마음이 밀려드는 경우도 있었다. 슬픈 현실이다. 선배 대가들 이를테면 광복 후 우리 서단을 풍미했던 소전, 검여, 일중, 여초, 강암, 소암 선생님 등의 작품도 미술시장에서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싼 값에 나돌아 다니고 있는 판에, 내 작품에 형성되지도 않은 가격을 내 스스로 붙이자니 그 또한 못할 짓이어서 그냥 서예계의 동향을 흘러가는 대로 두고 보고 있자니 언제부터인가 서예 작품 값이 표구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친구라며 다가와 서예가를 향해 던지는 염장을 지르는 말 한마디:
“어이 친구! 자네 서예가로 유명하다며? 내게 글씨 하나 써주소. 표구는 내가 할게.”
“표구는 내가 할게”라니? 그렇다면 내가 표구까지 해서 주기를 바랐단 말인가? 친구가 세상물정을 모르고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서예작품이 사회적으로 값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요즈음 세상에 서예작품을 사다가 인테리어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내가 표구비를 들여 자네 작품을 표구해서 비록 잘 안 어울리는 인테리어이기는 하지만 내 사무실에 걸어 놓으면 그래도 자네 작품이 ‘벽에 걸리는 대우’를 받는 셈이잖아? 그나마 자네 작품이 벽에 걸리는 영예를 안게 해 줄 테니 한 폭 써줘.”라는 의미가 담긴 말일 수도 있다. 우리 서예가들을 슬프게 하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 슬픈 현실 앞에서 우리 서예가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 자존감을 무너뜨리려 하는 환경에 처할수록 더 굳세게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 표구비가 작품 값보다 더 비싼 세상이라 할지라도 서예가는 서예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하고 서예가로서 자존감을 굳건하게 가져야 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큰 목소리로 외쳐야 한다.
“서예는 결코 인테리어의 소품이 아니다!”
그리고 반성해야 한다. 우리 서예가 자신이 서예를 인테리어 소품으로 여겨오지는 않았는지를 뼈아프게 반성해야 한다. 그동안 서예가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실지로 이런 말들이 오간 게 사실이다.
“서예가 이 시대에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서예작품이 현대의 주거환경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야. 우리가 봐도 고급 아파트나 화려한 사무실의 번쩍이는 인테리어에 비하면 왠지 서예는 초라하고 궁상맞고 촌스럽게 보이는 게 사실이야. 예전에는 병원에도 으레 ‘의세제중(醫世濟衆: 세상을 치료하고 민중을 구제한다)’라든가, ‘박시제중(博施濟衆: 널리 사랑과 의술을 베풀어 뭇 사람을 구제한다)’라는 등의 서예작품이 걸렸었는데 이제 먼 시골 병원에나 이런 서예작품이 걸려 있을까 도시의 큰 병원에는 이런 서예 작품은 눈 씻고 보려 해도 없어, 그 이유가 다 서예작품이 이 시대의 세련되고 화려한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야. 이제 서예의 시대는 간 것 같아…….”
우리 서예가들은 왜? 언제부터? 서예작품을 인테리어의 소품으로 여기기 시작했을까? 서예가로서 자존감을 상실하면서부터이다. 서예의 고귀한 예술성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나는 동아시아 문화·예술의 정수인 서예를 창작하고 서예를 수호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부터 서예가를 자칭하면서도 서예 공부를 소홀히 하게 되었고, 공부를 안 하면 안 할수록 서예에 대한 자부심과 서예가로서의 자존감은 형편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리고 자존감이 무너진 그 자리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세속적인 관심이 쏠리기만을 기대하면서 서예를 대중의 눈에 드는 인테리어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좀 바꿔보면 현대의 인테리어와 좀 더 어울릴까?’ 하는 생각에 흑백의 절제미를 상징하는 서예에 과도한 색을 입히기도 하고 캘리그라피라는 이름 아래 기괴한 도안을 얹어서 전시장에 내놓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런 서예에 대해서도 인테리어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더 이상 출구를 찾지 못한 서예가들은 인테리어 소품으로서의 기대마저 접고, 아예 보다 더 싼값의 표구를 찾게 되었다. 작품의 보존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작품에 겉모습만 그럴싸한 값싼 옷을 입히기 시작하였다. 개인도 싼값의 기계표구를 선호하고, 이름난 공모전이나 단체전에서도 ‘일괄 기계표구’를 방침으로 세웠다. 이때부터 서예가들의 마음에는 심지어 이런 생각들이 자리하게 된 것 같다.
“언감생심, 내 작품이 오래도록 보전되기를 바라겠어? 서예라는 예술 장르 자체가 소멸될 지경에 이르렀는데… 대강 싼 값의 표구를 해서 인맥을 통해 한 점이라도 팔아먹으면 그만이지.”
서예가로서 자존감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상태의 생각이다. 설마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우리 서예계에서 이러한 현실이 짐작되고 목도되는 경우는 적지 않다. 서예가 자신의 서예에 대한 자부심과 서예가로서의 자존감이 이렇게 무너진 상태라면 어떻게 한국서예의 진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내실이 풍부한 작품은 틀이 아무리 초라해도 알아보는 사람은 다 알아본다. 그리고 진정으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은 누구라도 아름답다고 느낀다. 피카소의 작품 앞에서 난해하다는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모르긴 몰라도 뭔가 있다’거나, ‘단지 기괴하기만 한 게 아니라 왠지 아름답다’거나, ‘까닭 모를 슬픔이 밀려오기도 하고 기쁨이 샘솟기도 한다’는 등의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이런 느낌을 갖고서 피카소의 작품을 감상하지 피카소의 그림을 단지 인테리어 소품으로 보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왜 인테리어 소품으로 격하하는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작품 대우를 하는 것일까? 작품의 내용이 진실하고 충실하며 뭔가 절실한 호소 같은 게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명작을 명작으로 알아보는 것이다.
앞서 꼬집은 바 있듯이 우리 서예가들이 그간에 행여 서예를 인테리어 소품으로 보는 관점을 가졌었다면 이제 그런 싸구려 관점에서 빨리 벗어나 진정으로 감동적인 서예작품을 창작하고자 하는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 처절한 마음으로 절실한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 서예작품의 감동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필획, 결구, 장법 등 서예작품의 감동을 창출하는 요소들은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감동의 요소는 바로 ‘말씀’이다. 서예는 말씀을 쓰는 ‘말씀의 예술’인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 서예계는 서예작품이 감동을 창출하는 핵심 요소인 ‘말씀’에 대해서는 소홀하고 오히려 ‘틀’의 인테리어적 효과에만 몰두했다. 당, 송, 원, 명, 청 역대 중국의 여러 서예 명가들과 고려, 조선의 서예 명가들은 진실하고 감동적인 말씀을 성실하고 절실하게 쓰는 것을 통해 감동을 창출하고, 그렇게 창출한 감동을 척독, 권자, 축, 액자 등의 ‘틀’에 담아 잘 보존하면서 시대를 이어 후대에 전했는데 오늘날의 우리 서단은 내용으로서의 말씀은 부실하고 ‘틀’이 가지는 인테리어적 효과에 더 몰두한 것이다. 왕희지의 <난정서(蘭亭敍)>, 안진경의 <제질고(祭姪稿)>, 소식의 <한식시권(寒食詩卷)>, 황정견의 <한식시권발(寒食詩卷跋)>, 축윤명의 <적벽부(赤壁賦)>, 동기창의 <예관전찬(倪寬傳贊)>, 추사 선생의 <대팽·고회(大烹·高會)> 대련, 김구 선생의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등이 다 ‘말씀’에 작가의 진실한 마음과 성실한 태도와 절실한 소망을 얹어 쓴 작품들이다. 그러므로 이들 작품에는 이야기가 있고, 정감이 있고, 감동이 있다. 그런데 금세기 한국서단은 오히려 ‘말씀’은 도외시한 채 서예의 인테리어적 효과에 더 많은 관심을 쏟은 것이다. 이제는 우리 서예가들이 당당하게 큰 목소리로 외쳐야 한다. “서예는 인테리어의 소품이 아니다!”라고. 그리고, 대중들이 서예를 인테리어 소품으로 여기지 않도록 진실한 마음과 성실한 태도와 절실한 소망을 담아 감동적인 서예작품을 창작해야 한다. 말씀이 있는 감동적인 서예작품 앞에서 대중들은 서예를 더 이상 인테리어 소품으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서예가가 자존감을 가지고 “서예는 인테리어의 소품이 아니다!”라는 말을 외치고 또 외쳐야 한다. 그리고 ‘말씀’을 담아 감동적인 작품을 창작해야 할 때이다. 그렇다면, 어떤 말씀을 어떻게 골라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