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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포 허유 산수서예전
  • 관리자 관리자
  • 등록 2026-07-03 11:29:48
  • 수정 2026-08-06 13:4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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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시기간 : 2026년 7월 15일 ~ 7월 21일
  • 전시장소 : 인사동 한국미술관 3층
  • 초대일시 : 7월 17일(금) 오후2시




창포 허유 산수서예전

허유 선생 작품 <眉叟 許穆 詩>, 월간지 7월호 표지 게재


허유 선생 프로필




창포(蒼浦) 허유(許由) 선생의 서예와 비림(碑林),

한자 문맥을 잇고 금석(金石)의 역사를 새기다 


시대의 격랑을 넘어 예술로 승화된 궤적


창포(蒼浦) 허유(許由) 선생은 평생을 서예와 금석학(金石學)에 매진하며 한국과 중국의 문화 예술 교류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 온 거장이다. 농경 사회에서 산업화를 거쳐 IT 강국으로 도약하는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겪어온 선생은, 1946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산수(傘壽, 80세)를 맞이하기까지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의 지식을 엮어내는 문화적 가교 역할을 해왔다. 선생의 아호 ‘창포’는 고향인 충남 공주 반포면(反浦面)의 ‘포(浦)’와 금강의 푸른 창벽(蒼壁)에서 ‘창(蒼)’을 따온 것으로, 대자연의 기상을 붓끝에 담아내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다. 시대적 경험은 창포 선생의 서예가 단순한 기교를 넘어, 역사의 무게와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지식 생산의 그릇으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2026년 7월 15일부터 21일까지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열리는 <창포 허유 산수서예전(傘壽書藝展)>은 단순한 개인전을 넘어, 선생이 한평생 구축해 온 유장하고 돈후한 서예술 세계와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방대한 업적을 총망라하는 지식 생산의 결정체이다. 전시작 200여 점에는 창포 선생의 작품 120점과 중국, 일본, 대만 등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60여 점의 축하 작품이 포함된다. 이는 37년간 이어온 선생이 여러 국가 간에 남긴 문화 예술적 발자취를 입증하는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許由 作, 春如海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철학과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서예 세계


창포 허유 선생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이념은 가문 대대로 내려온 ‘가전충효 세수청백(家傳忠孝 世守淸白)’의 철학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선비 정신, 그리고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태도이다. 1968년 서봉 김사달(西峯 金思達, 1928~1984) 박사에게 서예를 사사한 창포 선생은 1974년 국전(國展) 입선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선생의 작품은 주로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넘나들며, 꾸밈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미학을 구현한다. 특히 선생은 서예를 통해 과거와 현재, 남(男)과 여(女)의 지식을 교차시키는 선구적인 시도를 선보였는데,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등 역사적 여류 시인들의 작품을 주요 서제(書題)로 삼았다. 27세의 나이로 요절한 허난설헌의 비극적 삶을 조명하는 한편, 그녀의 시가 명나라 사신을 통해 중국과 일본에 전해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서예 작품으로 재현하며 여성 문학의 국제적 위상을 증명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서예를 수학함에 있어 요행을 바라지 않고 끊임없는 수련을 강조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왕희지(王羲之)와 아들 왕헌지(王獻之)의 일화를 작품으로 승화시켜 그 교훈을 알리기도 한다. 아들 왕헌지의 글씨에 점 하나를 찍어 ‘클 태(太)’ 자를 완성한 왕희지의 부인 일화와, 비법을 묻는 아들에게 아홉 개의 물독(동이)을 가리키며 “이 물을 벼루에 다 갈아 없애는 것이 비법”이라고 답한 왕희지의 가르침은 허유 선생이 평생을 걸쳐 증명해 온 끈기와 노력의 철학을 대변한다.

또한, 창포 선생은 연암 박지원 선생의 《열하일기》에서 영감을 받아, 세계 각국을 누비며 국제 학술대회와 문화 교류를 진행하는 동안 기록한 역사와 풍속을 수필 형식의 기행문 50여 점을 엮어 이번 전시에 함께 선보였다. 이는 다양한 지식을 연결하고 융합하는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許由 作, 論語 句

시공을 초월한 금석문(金石文)의 보고, 한국비림박물관 건립


허유 선생의 독보적이고 거시적인 업적은 금석문(金石文)에 대한 해박한 식견을 바탕으로 충북 보은에 건립한 ‘한국비림박물관(韓國碑林博物館)’이다. 금석학(金石學) 연구는 서예사(書藝史), 미술사, 인물사 등 다방면의 기초 자료를 탐독해야 하는 학문이자 교육의 현장이다. 선생은 “비문(碑文) 한 점에는 역사, 문학, 종교, 회화, 서예, 조각 등 여섯 가지의 학문과 예술이 담겨 있다.”고 통찰하며, 비림(碑林)을 살아있는 현장 교육의 도장(道場)으로 탄생시켰다.

선생은 작품집 서문에서 “오늘날 우리의 학계는 국학경시(國學輕視)의 풍조가 만연하여 외국어 투성이의 문물(文物)뿐이다. 한문 문화권인 동양 삼국에서는 일찍부터 한문(漢文)과 한자(漢字)가 모든 학문이 기초이며 근간(根幹)이어서 전 분야가 한자로부터 비롯하였던 것이다. 한자는 소리글이 아니라 소리에 뜻을 더한 글이다. 그러므로 말로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전달되고 뜻이 전해지는 과학(科學)이 있는 글이다.”라고 소회하였다. 

한국비림박물관에는 신라 시대의 김생과 최치원부터 백제, 고려, 조선의 이성계, 추사 김정희, 그리고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약 1,500점에 달하는 한국 역사의 귀중한 필적들이 망라되어 있다. 가히 ‘역사의 보고’라 불릴 만하다.


許由 作, 高處不勝寒


선생의 비림 조성 작업은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를 아우르는 방대한 지식 융합 프로젝트로 확장되었다. 몇 가지만 정리해본다. 

먼저 『논어(論語)』 비림 조성이다. 497문장으로 이루어진 『논어』를 중국경필서법가협회 장화경 주석의 주관하에 497명의 중국 대가들이 각체로 쓴 후 돌에 새겨 한국으로 이관하였다.

또한 노자의 『도덕경』 98문장을 98명의 서예가가 참여하여 도덕경(道德經) 비림을 완성하였다.

특히 권오실, 신영희, 이현종, 김정묵, 유승란, 고인숙, 박정숙, 김숙 선생 등 148명의 한국 작가가 주도하여 2년 6개월에 걸쳐 구약과 신약 총 148만 자를 500점의 돌판에 새기는 성경(聖經) 비림은 전무후무한 역사적 과업이었다.

이러한 성과는 전통 서예의 맥을 보존하는 동시에, 문자를 매개로 인류의 보편적 지혜를 영구히 후대에 전승하려는 선생의 거시적인 혜안이 낳은 결실이다.

또한, 선생은 민간 예술의 가치를 발굴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2025년 중국 농민 서예가 이회소의 독창적인 ‘적수전(滴水篆)’ 작품에 감탄하여 즉시 그 작품을 한국비림에 소장하고 돌에 새겨 영구히 전승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전통 서예의 맥을 보존함과 동시에 현대의 혁신적인 지식을 끊임없이 수용하는 개방적 지식 생산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許由 作, 許蘭雪軒 詩

한중 문화교류의 선구자


허유 선생은 1992년 한중 수교 이전부터 이념의 장벽을 넘어 양국 간의 문화 교류를 선도해 온 독보적인 민간 외교관이다. 1989년 미국에서의 성공적인 두 차례 개인전에 이어, 1990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에서 서예전을 개최하였다. 당시 국교가 없던 상황에서 한글로만 보도된 신문 기사 탓에 북한 고위층으로부터 남조선 간첩으로 오인받는 혹독한 시련을 겪었으나, 선생은 흔들림 없이 예술을 통한 교류를 이어갔다.

선생의 37년 중국 교류사는 극적인 인연과 역사적 성과로 가득하다. 몇 가지만 정리해본다. 

홍콩에서의 하얼빈공대 김영덕 교수의 부인에게 보인 선행이 계기가 되어 하얼빈공대와의 깊은 인연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한중 교류의 거대한 마중물이 되었다. 선생은 중국 731부대(생체실험 부대) 유적을 직접 방문하여 김성민 관장으로부터 자료를 제공받아 한국의 박물관에 300여 점을 전시, 한국 육해공군 장교들에게 역사적 실상을 알리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특히 2000년 6월,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내외의 20일간의 중국 방문 일정을 기획하고, 강택민 주석의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내어 중국한원비림(中國翰園碑林)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휘호글씨 비석 제막식을 거행하도록 한 것은 국가 최고위급 외교에 필적하는 성과였다. 또한 이수성 전 국무총리를 모시고 한원비림(翰園碑林)과 노자 탄생지에 한국 소나무를 기념 식수하며 양국의 우호를 다졌다.


許由 作, 墨香

더 나아가 선생은 잊혀진 역사 발굴에 심혈을 기울였다. 12세에 유학하여 18세에 장원급제하고 ‘황소의 난’을 토벌한 해동문장가 최치원 선생의 발자취를 중국 여러 지역에서 연구, 탐사, 재조명하였다. 또한, 18세에 상해로 건너가 중국 쿤밍(昆明)의 강무학교(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청산리 전투를 이끈 철기 이범석 장군의 행적을 운남성 사회과학원과 함께 발굴하여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許由 作, 申師任堂 詩 望親庭           許由 作, 德高人長壽


이러한 반평생의 노력은 문화 교류의 체계화로 이어졌다. ‘한밭 컴’ 국제청소년 서화공모전을 적극 지원하여 미래 세대의 교류를 이끌었고, 2025년 4월에는 중국 한원비림 내에 ‘한국관 미술관’이 정식으로 개관하는 역사적인 결실을 맺었다. 중국의 평론가 장아오진(張傲金)은 산발적인 행사를 넘어 이처럼 일상적이고 제도화된 교류 시스템을 구축한 허유 선생을 가리켜 “시공을 초월하고 마음을 소통하는 문명 상호 학습의 페리맨(뱃사공)”이라고 극찬하였다. 구체적으로 “허유 선생은 중원 깊숙한 곳에서 고운(古韵)을 탐구하고 황푸(黄浦) 강변의 아집필묵(雅集筆墨) 인연에 이르기까지, 허유 선생님은 반평생의 끈기로 ‘이문회우 이자전정(以文會友 以字傳情)’의 인문적 진리를 해석했다. 그는 중한 문화 교류의 뛰어난 사절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한자 문맥을 충실히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사람이다. 그의 실천은 공유된 문화유산이 민간화, 메커니즘화된 심층 교류를 통해 지역 문명 상호 학습을 효과적으로 심화하고, 민심의 공감대를 모아 인류운명공동체 구축에 필수적인 문화적 힘을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화와 디지털화가 얽힌 새로운 시대에, 한자를 다리로 하고 문명을 영혼으로 하는 이 굳건한 지킴은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가 문화 간 대화를 탐구하는 데 깊고 따뜻한 계시를 제공하였다.”라고 언급하였다. 



許由 作, 觀海聽濤


영원히 빛날 묵향(墨香)의 유산


창포 허유 선생의 산수서예전은 단순히 한 개인의 예술적 성취를 회고하는 자리가 아니라, 동북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문맥을 잇고 문명의 다리를 놓은 거대한 지식 생산의 현장이다.

이번 전시에 축하의 뜻을 전해온 면면은 그의 국제적 위상을 증명한다. 국내의 이수성 전 국무총리, 이낙연 전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중국경필서법가협회 장화경(張華慶) 제5회 주석, 이빙(李冰) 주석, 웅결영(熊潔英) 감사장, 중국 개봉 한원비림 이효평(李孝平) 동사장, 중국한원서화원 곽연원(郭連遠) 원장, 구단(寇丹) 정주대학교 교수, 하얼빈 서법가협회 홍철군(洪鐵軍) 주석, 731부대 죄증 전시관 김성민(金成民) 관장, 상지박물관 하수령(何樹嶺) 관장, 일본의 서일본서도협회 시무라 묘석(師村妙石) 회장, 대만의 국제난정필회 장병황(張炳煌) 회장, 중국의 심양 중국미술관 한리(韓莉) 관장, 연길시 이향단미고연구소(李香丹米糕硏究所) 이향단 소장 등 각국의 문화 예술계 거장들이 일제히 선생의 80년 예술혼에 찬사를 보냈다. 이들은 한결같이 허유 선생이 지닌 ‘인의예지신의 선비 정신’과 ‘서예술을 통한 세계 평화 및 선린 우호의 실천’을 높이 평가하였다.


許由 作, 飛龍得珠


이수성 전 국무총리는 “고운 최치원 선생과 추사 김정희 선생 이래로 금석문(金石文)에 대하여 해박한 식견으로 충북 보은에 한국비림박물관을 만들었고, 중국 서안 고대비림과 개봉시 중국한원비림을 왕래하면서 중국한원비림 창시자 이공도 선생을 만나면서 창포를 친자식처럼 여기시는 이공도 선생을 볼 때, 창포의 진실성과 인의예지신을 실천하는 신사도와 선비정신, 그가 쌓은 덕품과 결과에 다시 한 번 놀라고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찬사하였다. 중국, 일본, 대만 등 수많은 해외 귀빈들이 헌사를 보내온 이유는 허유 선생이 서예가이자 사상가이며, 역사가이기 때문이다.

허유 선생이 금석(金石)에 새긴 예술과 역사는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지식 생태계를 풍요롭게 만든 위대한 여정이었다. 선생은 “불경일사 부장일지(不經一事 不長一智), 한 가지 일을 경험하여야 한 가지 지혜를 얻는다는 성현의 말씀을 근본으로 삼아 80년을 지나왔다.”고 하였다. 전통의 맥을 올곧게 지키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발굴하고 연결해 온 창포 선생의 발자취는, 쉼 없이 ‘불경일사’하고, ‘부장일지’ 해온 삶의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나아가 한국 현대 서예사는 물론 글로벌 문화 외교사에 있어서도 금석(金石)의 유산으로 깊은 울림을 전한다.  [이용진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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